만성신부전 환자들이 인공신장실에서 혈액투석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헬스코리아뉴스 D/B][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신장 기능이 급격히 떨어진 중환자는 혈액에서 노폐물과 과도한 수분을 제거하는 투석 치료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필터에 감염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까지 달라붙으면, 약을 투여하고도 충분한 치료 효과를 얻기 어려워진다. 항진균제 '카스포펀진(caspofungin)'과 특정 소재의 혈액여과막을 함께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런 위험이 제기되면서, 유럽, 영국, 한국 등 세계 각국 규제 당국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은 13일(현지시간) 지속적 신대체요법(CRRT)을 받는 환자에게 '카스포펀진' 등 에키노칸딘 계열 항진균제를 투여할 때 필터의 약물 흡착 위험을 고려하도록 안전성 정보를 발령했다. MHRA는 임상적으로 적절한 경우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 소재 필터 사용을 시작하거나 필터 회로를 교체한 뒤 최소 6시간이 지나 약물을 투여하도록 권고했다.
CRRT는 혈액을 체외 회로로 순환시키면서 필터를 통해 노폐물과 수분을 천천히 제거하는 치료다. 주로 중환자실에서 혈압과 혈액순환 상태가 불안정한 환자에게 시행한다. '카스포펀진'은 칸디다균 등이 혈액이나 장기까지 침범한 진균감염을 치료하는 약물로, 신장 손상과 감염을 동시에 겪는 중환자는 두 치료를 함께 받는다.
문제는 PAN 소재 필터에 약물이 달라붙는 '흡착' 현상이다. 혈액 속에서 감염 치료에 쓰여야 할 약물 일부가 필터에 붙잡히면서 치료 효과가 떨어질 위험이 생긴다. MHRA는 "중환자의 항진균 치료 실패가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 "필터 또는 항진균제 교체"…영국 "현장 적용 어려워"
유럽 의약품청(EMA)의 약물감시위험평가위원회(PRAC)는 앞서 '카스포펀진' 치료 환자에게 CRRT를 시행할 때 PAN 소재 필터를 다른 소재로 교체하거나 다른 항진균제 사용을 고려하도록 권고했다.
MHRA는 의료진 의견과 현장 장비 여건, 추가 연구를 검토한 결과 유럽의 필터·항진균제 교체 권고를 영국 진료현장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에키노칸딘 계열 약물이 침습성 칸디다감염의 주요 치료제이고, 다른 항진균제 선택도 균의 약물 감수성과 내성 때문에 제한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새 필터 사용 직후 약물 흡착이 가장 크고, 시간이 지나 필터가 포화되면 흡착이 줄어드는 특성을 반영해 투약 시점 조정을 권고했다. 필터 회로를 교체할 때마다 초기 흡착 위험이 다시 커지는 만큼, 약물 투여 일정과 필터 교체 시점을 함께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MHRA는 항진균제 투여를 위해 CRRT를 일률적으로 늦추거나 중단하는 대신 환자 상태에 따라 담당 의료진이 판단하도록 했다. 병원에는 필터의 약물 흡착과 투약 시점을 반영해 진료 지침과 표준운영절차를 개정하도록 권고했다.
한국도 '카스포펀진' 4개사 8개 품목 허가사항 변경 추진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유럽의약품청(EMA)의 안전성 검토 결과를 근거로 '카스포펀진' 성분 제제의 허가사항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사전예고 기간은 10월 26일까지이며, 변경명령 예정일은 10월 27일이다.
변경안은 '카스포펀진' 투여 환자에게 지속적 신대체요법을 시행하면서 PAN 소재 혈액여과막을 사용하면 약물이 흡착돼 약효가 감소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약물 용량을 늘려도 이러한 약효 저하를 예방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대체 혈액여과막 또는 다른 항진균제 사용을 권고했다. 치료 실패가 감염 악화와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험도 함께 반영했다.
국내 변경안은 필터나 항진균제 교체를 권고한 유럽과 같은 방식이다. 영국이 권고한 'PAN 소재 필터 사용 시작 또는 필터 회로 교체 후 최소 6시간 뒤 투약'은 포함하지 않았다.
대상은 '카스포펀진' 성분을 함유한 한국MSD의 '칸시다스주', 펜믹스의 '펜믹스카스포펀진아세테이트주', 한림제약의 '카스진주', 삼천당제약의 '카스펀주'다. 각 제품의 50mg·70mg 제형을 포함해 4개사 8개 품목이다.
투석 필터에 항진균제 '카스포펀진'이 흡착돼 약효가 떨어질 위험에 각국 규제당국이 대응에 나섰다. 한국과 유럽은 대체 필터 또는 다른 항진균제 사용을 권고하고, 영국은 투약 시점 조정을 권했다. [AI 생성이미지]실험에서는 약물 손실…환자 연구는 다른 결과
한편 필터의 약물 흡착을 둘러싼 연구 결과는 엇갈린다. 2023년 발표된 체외 실험은 PAN 계열 ST150 필터에 '카스포펀진'을 노출해 약물 농도 변화를 측정했다. 혈액 대신 결정질 용액을 사용해 필터에 의한 약물 손실을 분석한 연구다.
그 결과 단백질에 결합하지 않은 약물의 농도가 6시간 안에 정량한계 아래로 떨어졌다. 연구진은 "투입량을 늘려도 필터에 의한 약물 손실을 충분히 해소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는 해당 실험 조건에서 확인된 결과다.
2025년 발표된 프랑스 연구는 중환자 35명에게서 측정한 혈중 '카스포펀진' 농도 66건을 후향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PAN 필터를 사용한 환자에서 총 혈중 약물 농도가 감소하는 현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연구진은 "실제 치료 결과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연구진은 약물 농도를 측정한 시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러 차례 투약한 뒤 측정한 농도만으로는 새 필터 사용 직후의 약물 손실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은 "필터 사용 시작·교체 직후의 초기 농도와 실제 약리작용을 하는 비결합 약물의 농도를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