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디 엘-사예 개인전 '테레사 이후' 전시 전경. /연합뉴스 제공 정돈된 체계 바깥에 남겨진 지점. 분류의 편리함 뒤에 가려진 개인의 기억과 서사의 전시가 펼쳐진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오는 6월 21일까지 엘-사예의 개인전 '테레사 이후'(For Theresa)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엘-사예의 자료 수집과 편집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제도와 분류 체계가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하는지를 질문한다.
맨디 엘-사예 작 '세계의 명화(발화)'. /연합뉴스 제공 신작 '세계의 명화' 연작은 다층적인 언어 실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확장한 작업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한국의 한 고서점에서 '세계의 명화'라는 책을 발견한 것에서 비롯됐다. 책의 표지에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작이 한국 헌책방까지 유입된 것을 보며 서구 중심 미술사에 내재한 위계 구조를 떠올렸다.
그는 책 표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옮기고, 한국 벼룩시장 인쇄물과 조선 민화, 책가도, 고지도, 독립신문 등의 이미지를 겹쳐 쌓은 뒤 격자무늬를 덧입혀 화면을 구성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요소가 한 화면에서 교차하며 기존의 의미 체계를 뒤흔든다.
맨디 엘-사예 개인전 '테레사 이후' 전시 전경. /연합뉴스 제공 이 작업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 제목의 '테레사'(Theresa)는 차학경의 영어 이름이다.
차학경의 유작 소설 '딕테'는 다양한 사진과 글을 통해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스 신화 속 뮤즈들, 작가 자신 등의 삶을 복잡하게 교차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러 언어와 기억의 조각을 엮어 서사를 구축했던 차학경의 방식처럼, 작가도 이미지의 파편을 재배열해 새로운 이미지를 담는다.
맨디 엘-사예 작 '서제 공간'. /연합뉴스 제공 작품 '서재 공간'은 제목 그대로 작가가 전시장 안에 서재처럼 마련한 장소다.
한국 전통 민화 '책가도'를 참조하거나, 지도, 의학, 예술 등 작가의 관심사가 담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배치했다. 지식이 선택되고 배열되는 과정과 학문에 대한 열망 등을 담았다.
또 다른 편에는 유리 진열장 작업인 '체화작용'을 설치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사용된 사적 기록과 오브제를 함께 배치해 일상의 사물이 예술의 맥락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맨디 엘-사예 작 '넷-그리드(축복)'. /연합뉴스 제공 '넷-그리드'(Net-Grid)는 작가의 대표 연작이다.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뒤, 화면 위에 격자를 덧입혀 질서와 구조를 엮는다. 이 격자는 정보를 정리하는 틀이면서 동시에 실체를 가리는 장치로 기능하며,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서구 미술사의 대표 이미지와 한글 텍스트를 결합한 작업, 라텍스를 활용해 신체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포착한 설치 등도 소개된다. 바닥 전체를 덮은 라텍스 작업은 전시장을 하나의 '피부'처럼 만든다.